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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시크릿! 이여 잘뛰고 여기! 경영(京營)에서 징수하는 군전(軍錢)·군포(軍布) 인포메이션얻어 가세요.이번달 추천!@ 정식으로! 반달리즘 이렇게 간단한데 왜 몰랐지?궁금하쥬? 두과채소..

by 7xw4ubi787lh 2020. 10. 17.

안녕하세요:)마리큐 이에용.영광스럽게도 제 사이트를 놀러와주셔서 고마워용.!세상이 맑은게 헤헤 즐거워요.언니오빠들은 오늘하루 무엇을 하며 보내시나요? :-ㅁ이제 이야기할 토픽은이에요.이제 준비되었으면 총알보다 빠르게 달려나갑니다. 가보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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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전과 군포는 경영(京營)에서 항상 독촉하는 것입니다.
거듭하여 징수[疊徵(첩징)]하는가를 잘 살피고 퇴짜 놓는 것을 금하여야만 원망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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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이 포스팅은 경영(京營)에서 징수하는 군전(軍錢)·군포(軍布) 에 관하여 알아보았는데요.도움이 좀 되셨나요?오늘 하루 즐거운 하루 되시길 빕니다.기억해주세요. 먀리뀨 인사드립니다.씨유레이러~바이~

반가워요:-ㅁ마리끄 이에요.또한번 마이 블로그를 놀러와주셔서 고마워용.:-ㅁ하늘이 맑은게 넘 만족해요.이웃님들~ 오늘 무슨일 하고 보내시나요? :ㅁ이번에 논의할 주제는입니다.준비 되셨으면 지금이순간 시작해보도록 할게요. 고고씽 :ㅁ

그거알아요? 저두요 #반달리즘 #아메리칸 반달리즘 #사이버 반달리즘 를 정

말 궁금했었는데요여러분들 행복에 저도 행복한 마음으로 알아냈어요!자, 이제 진짜 시작해 볼까요?구독자분들의 행복에 힘입어바로 아메리칸 반달리즘 시즌2 시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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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게도 반달리즘입니다.이 글이 인생이 두려운 당신에게, 그리고 좀처럼 인생을 믿지않으려고 하는 잇님들에게 살아야겠다는 명확한 관념을 드릴 수 있길 많이 바란다.언젠가 이런 느낌이 들은적 있으실까요?나는 지금 무엇을 위하며 사는걸까?요즘, 이슈가 엄청 올라가는 관심사 중에서많은 분들이 요청하시는게 바로 반달리즘입니당힘들게 고민하실 수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빈도수높게 궁금해하시는 내용이죠.쾌적한 그늘을 감상하며 검색을 감상할 수 있는 행복한시간 검색하신분들의 없도록 열심히하겠습니다.항상 느끼지만 달콤한 음식을 적당히 섭취하고 쾌적한 온도에서 블로깅 하는것은 요즘의 행복이랑께요요기 마리끄 포스팅에서 높은 품질의 포스트 즐기고가셔요.

반달리즘은 문화유산이나 예술품 등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지만, 넓게는 낙서나 무분별한 개발 등으로 공공시설의 외관이나 자연 경관 등을 훼손하는 행위도 포함됩니다.
반달리즘이라는 말은 고대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Vandals)에서 비롯되었다.
폴란드 남쪽에 살던 반달족은 민족대이동의 시기에 남하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5세기에는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그곳에 반달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455년에는 로마를 침공했습니다.
반달족은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언된 아리우스파를 신봉하고 있어서 로마 가톨릭과는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중세 기독교 교리체계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북아프리카 히포(Hippo)의 주교로 있을 때 반달족의 침공을 직접 겪었는데, 이 일은 반달족에 대한 적대적 인식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때문에 로마를 침공한 반달족은 문화 파괴자이자 약탈자로 인식되었고, 고대 로마의 문화를 이상화했던 르네상스 이후 이러한 인식은 더욱 확산되었다.
하지만 역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 반달족이 로마를 점령했을 때 파괴와 약탈 행위가 유독 심하게 자행되지는 않았습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반달족은 중세 이후 고대 로마 문명을 파괴하고 약탈한 자들로 여겨졌다.
반달리즘이라는 용어는 1794년 프랑스 블루아(Blois)의 주교인 투르 앙리 그레구아(Henri Grégoire)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 당시 군중들이 가톨릭교회의 건축물과 예술품을 파괴한 행위를 반달족의 로마 침략에 비유하면서 반달리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말이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지면서 반달리즘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다.
역사에서 반달리즘은 전쟁이나 사회의 급격한 변동이 있을 때마다 매우 빈번히 나타났다.
특히 종교적·민족적 갈등은 반달리즘을 부추기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는 신교도들이 가톨릭 성당의 조각상과 벽화 등을 파괴하는 행위가 자주 발생했으며, 라틴아메리카를 침략한 유럽의 정복자들은 그곳에 있던 원주민의 신전을 파괴했습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바미안(bamiyaan) 석불을 파괴한 것과 2015년 이슬람국가가 이라크의 모술과 시리아의 팔미라 등에서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유적들을 파괴한 것은 현대의 대표적인 반달리즘 사례로 꼽힌다.
한국의 경우에도 조선시대에 폐불(廢佛) 정책으로 사원과 석불, 석탑, 불화 등을 파괴한 대규모 반달리즘의 사례가 발견되며, 오늘날에도 종교적 이유로 전통 사찰이나 참성단, 당산나무 등을 훼손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게 보고되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 이익만을 앞세운 무분별한 개발 행위로 전통 문화유산이나 자연 경관을 해치는 사례도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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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백질 공급원뿐만 아니라 뿌리혹 박테리아를 이용해서 공중질소를 고정하여 이용할 수 있어 지력증진 효과가 있음.
완두, 강남콩, 콩, 녹두, 라이머콩, 동부, 편두, 땅콩, 잠두, 팥 등이 속함.
콩과채소류.

이번 주제는 두과채소류 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마음에 좀 드시나요?그럼 오늘 하루도 보람찬 하루 되세요.요기까지 마리큐 인사드립니다.다음에 다시만나요

안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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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諱)는 여발(汝發)이고, 자(字)는 군실(君實)이며, 성은 이씨(李氏)이니, 그 선대(先代)는 한산(韓山) 사람입니다.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은 고려 말기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호는 가정(稼亭)입니다.
그가 이색(李穡)을 낳으니 한산 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고 호는 목은(牧隱)입니다.
이 부자가 문장과 충절로 전조(前朝)에서 이름이 크게 알려졌다.
(목은이) 이종선(李種善)을 낳으니 본조(本朝)에서 판서를 지내고 시호가 양경(良景)입니다.
이분이 이계전(李季甸)을 낳으니 정난 좌익 공신(靖難佐翼功臣)이고 시호는 문열(文烈)입니다.
이분이 이우(李堣)를 낳으니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그쳤다.
5대를 지나 이흥준(李興畯)에 이르러서 동지중추(同知中樞)가 되고 한양군(韓陽君)에 봉해졌으니 이분이 공에게 고조가 됩니다.
증조 이흡(李洽)은 장령(掌令)을 지냈습니다.
조(祖) 이의배(李義培)는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책훈되어 한천군(韓川君)에 봉해지고 공청도 병마절도사(公淸道兵馬節度使)를 지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근왕(勤王)하여 쌍령(雙嶺)에서 전몰(戰沒)하였는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父) 이목(李穆)은 26세 때 역적 이괄(李适)이 서울을 범할 때 부원수(副元帥) 이서(李曙)가 개성에서 막았는데, 부군(府君)이 친 생질의 몸으로서 종군하였습니다.
관군(官軍)이 패하고 이괄이 진격하여 서울을 함락시키므로 부군이 서울에 잠입하여 적의 동정을 엿보다가 붙잡힌 바 되었다.
이괄이 병기(兵器)를 가지고 위협하여 항복을 받으려 했으나,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죽었는데, 특별히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에 추증하고 뒤에 호조 판서 한원군(韓原君)을 진증(進贈)하였으며, 나라에서 두 대(代, 한천군과 한원군)에 걸쳐 정려(旌閭)하였습니다.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연안 김씨(延安金氏)는 현령을 지낸 김희온(金希溫)의 딸입니다.
공은 광해군 13년인 신유년(辛酉年, 1621년) 10월 16일에 태어났다.
네 살 때 한원군이 몰(沒)하고 안마(鞍馬)가 홀로 돌아오자 자주 아버지를 불러서 찾았는데, 뒤에 사실을 듣고서 울다가 땅에 쓰러지니 보는 자가 불쌍히 여겼다.
하루는 (조모(祖母)) 이씨(李氏) 부인이 공을 데리고 가서 완풍군(完豊君)을 보았는데, 고기를 주고 일어나 춤추게 하자 공이 울면서 돌아가려고 하므로, 이씨 부인이 그 까닭을 물으니 입을 귀에다 붙이고 말하기를, “내 비록 어리지만 상인(喪人)인데 고기를 먹고 춤추게 합니까?” 하였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완풍이 공을 무릎 위에 놓고서 말하기를, “이 아이가 반드시 이씨 집안을 크게 일으킬 것입니다.
” 하였습니다.
한원군이 소덕문(昭德門) 안에서 살해당했는데, 공이 장성하여 한 평생을 마칠 때까지 그 길을 경유하지 않았습니다.
김 부인은 단장(端莊) 혜순(惠順, 인자하고 유순한 것)했는데 공이 가르침을 받아서 어김이 없었다.
16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는데, 이해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 겨울에 오랑캐의 침략이 있자 공이 두 분 부인(夫人)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이듬해 봄 성이 함락되자 두 부인이 한 필 말에 함께 타고 공이 말고삐를 잡아 달려서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배가 상류에서 온 것이 있었으나 건너기를 구하는 자가 하도 많으매 뱃사람이 인원이 많음을 두려워하여 모두 거절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공이 홀로 앞장서 물에 뛰어들어 애절하게 건너 주기를 호소하며 두꺼운 얼음이 어깨를 짓누르는데도 움직이지 않으니, 뱃사람이 그 지극한 정성을 애처롭게 여겨 배에 올려 태워서 공과 두 어버이가 모두 화(禍)를 면하게 되었다.
한천군이 전몰한 흉보가 이르자 도보(徒步)로 가서 언덕바지 비습한 곳에서 시체를 찾아 선영(先塋)에 귀장(歸葬)하고 어버이를 받들어 무덤 밑에 살면서 효성을 다하여 봉양하였습니다.
아는 이가 여역(癘疫, 전염병)에 걸려 공이 가서 문병했는데, 병자가 별안간 일어나면서, ‘대장군(大將軍)이 왔다.
’고 말하자, 뭇 귀신이 저절로 달아나서 병이 평복(平復)함을 얻으니, 듣는 자가 이상스럽게 여겼다.
공은 용맹이 있고 몸이 날래서 소 두 필의 힘이 넘고 몇 사람의 힘을 겸했으며 기사(騎射)에 능하였습니다.
효종 2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이듬해 32세 되던 임진년(壬辰年, 1652년 효종 3년)에 비변랑(備邊郞)이 되어 공문서를 가지고 밤에 박서(朴遾)공을 찾아갔는데, 밤이 깊은지라 방문 밖에 앉게 하고 공문 안에 적혀 있는 말을 묻자 촛불이 없는데도 틀림없게 읽었다.
박공이 기이하게 여겨 공석(公席) 위에서 칭찬했는데, 공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때마침 화로가 곁에 있어서 그 밝은 빛을 빌린 것뿐입니다.
” 했더니, 박공이 그 성실하고 순박함을 더욱 칭찬하였습니다.
겨울에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에 임명되고, 경력(經歷)을 거쳐서 계사년(癸巳年, 1653년 효종 4년)에 숙천 부사(肅川府使)에 임명되어 피폐한 백성을 잘 위무(慰撫)하였으므로 거사비(去思碑)가 있습니다.
갑오년(甲午年, 1654년 효종 5년)에 만포 첨사(滿浦僉使)로 옮기고 을미년(乙未年, 1655년 효종 6년) 가을에는 다시 영흥(永興)으로 옮겨졌다.
겨울에 조모 이씨 부인의 상을 당하였는데, 무술년(戊戌年, 1658년 효종 9년)에 복상(服喪)을 마치고서 장단 방어사(長湍防禦使)에 임명되었다가 겨울에 충청 병마절도사로 옮겨졌다.
기해년(己亥年, 1659년 효종 10년)에 절도사를 해면(解免)하고 금군 별장(禁軍別將)에 임명되었다가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며,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한흥군(韓興君)에 습봉(襲封)되었다.
회령은 북방의 큰 진영(鎭營)으로서 오랑캐 땅에 가까워 호시(互市, 무역 시장)가 있는데, 들어오는 여진 사람이 정하여진 수(數)가 없고 머무는 것이 기한 없어 침노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접대를 위한 지공(支供)으로 인해 폐해가 적지 않았습니다.
공이 도백(道伯)을 통하여 조정에 아뢰어서 자문(咨文, 청나라와 교섭하는 문서)을 보내 인준(認准)을 얻었으니, 그 뒤부터는 오는 자가 3백 20십 인에 불과하고 머무는 것도 20일을 넘지 않았으므로 북쪽 사람이 크게 힘입었다.
공이 처음 도임(到任)하여 호시가 열렸는데 차관(差官, 호시를 맡아보는 청나라 관원)이 지름길인 동문(東門)으로 들어오는지라 공이 일부러 맞이하지 않고 통역 맡은 사람을 칼 씌워서 베이려는 뜻을 보이자, 차관이 부끄럽게 여겨 말하기를, “잘못은 내게 있으니 그 죽음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 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드나드는 오랑캐들이 제 마음대로 횡포를 부려도 이를 금하는 자 없어 크게 백성이 괴로워하였는데, 공이 차관과 약속하여 까닭 없이는 관(館, 청나라 사람이 머무는 집)을 나오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백성이 비로소 안도하게 되고 비를 세워서 업적을 기록하였습니다.
현종(顯宗) 원년(元年, 1660년) 봄에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에 임명되었으나 전임자가 유임되어서 가지 못하였습니다.
신축년(辛丑年, 1661년 현종 2년) 여름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계묘년(癸卯年, 1663년 현종 4년)에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 겸 훈련도감 마병 별장(訓鍊都監馬兵別將)에 임명되었다.
갑진년(甲辰年, 1664년 현종 5년) 가을에 북도 병마절도사로 옮겨졌다가 병오년(丙午年, 1666년 현종 7년)에 기한이 차자, 정태화(鄭太和)공은 ‘공이 청렴 근신하여 군민(軍民)이 모두 편리하게 여긴다’고 말하며 다시 1년 더 유임(留任)시키기를 청하였습니다.
정미년(丁未年, 1667년 현종 8년) 여름에 부총관 겸 어영 중군(御營中軍)에 임명되었고, 겨울에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부총관ㆍ포도 대장(捕盜大將)ㆍ금군 별장(禁軍別將)을 겸하였습니다.
무신년(戊申年, 1668년 현종 9년) 정월에 현종이 편전(便殿)으로 불러 입대하여 특별히 병조 참판에 임명하자 사양하여 해임되고,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다가 갑자기 특명으로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기유년(己酉年, 1669년 현종 10년) 정월에 평안 병마절도사를 임명하여 내보내므로, 들어가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변경의 일을 말하기를, “안주(安州)의 성지(城池)가 완전치 못하여 유사시(有事時)에 보전할 수 없으니 마땅히 물러나 약산(藥山)을 지키라.
”고 하므로 공이 절하면서 말하기를, “신은 무부(武夫)입니다.
군려(軍旅)로서 전하를 섬기는 것이니, 오직 죽기로 지키는 일을 알 뿐 다른 것은 모릅니다.
” 하였습니다.
도임(到任)하자 활쏘기 등 무예(武藝)를 익히고 기계를 수선하여서 진전을 보지 않은 일이 없었으나 서북 지방의 성지(城池)를 수축하지 않음이 이미 오래되어 늘 걱정하였습니다.
공이 회령에 있을 때에는 적루(敵樓, 적의 동정을 바라보는 망루(望樓))를 세웠고, 행영(行營)에 있을 때에는 무너진 보루(堡壘)를 수축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나무를 베고 벽돌을 운반하여서 뜻하는 바가 있었으나 반년도 못되어서 절도사의 벼슬이 갈려 돌아가게 되었으므로 일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가을에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완(李浣)이 사면되자, 정 상국(鄭相國, 정태화(鄭太和))이 말하기를, “전임 장수가 법을 시행함이 명확하고 명령에 믿음이 있어서 모든 일이 질서 정연했으니, 반드시 중후(重厚)하며 변경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를 얻어서 그 뒤를 잇게 해야 합니다.
” 하고 공을 천거하여 대신케 했는데, 갑자기 혐의(嫌疑) 있어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고쳐졌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고, 비국 제조(備局提調)ㆍ포도 대장(捕盜大將)을 겸하였습니다.
경술년(庚戌年, 1670년 현종 11년)에 발에 병이 있어 사면을 원했으나 윤허 받지 못하고 어의(御醫)가 와서 병을 진찰하였습니다.
신해년(辛亥年, 1671년 현종 12년) 2월에 휴가를 청원하여 온천에 가서 목욕하게 되자, 임금에게 하직하면서 부절(符節)을 바쳤으나 청납(聽納)하지 않고 선온(宣醞)을 내리며 물건을 하사(下賜)함이 극히 후(厚)하였습니다.
4월이 되도록 공이 돌아오지 않자 금군(禁軍)이 오래도록 주수(主帥)가 없습니다고 대각(臺閣)에서 말이 있으므로, 공이 힘써 사직하며 소(疏)가 들어간 지 39일이 되어도 비답이 내리지 않았는데, 돌아와서 다시 사직하는 소를 올려서야 비로소 해면되었다.
가을에는 부총관ㆍ총융사(摠戎使)에 임명되었으며, 겨울에 다시 어영(御營)으로 들어가 비변사(備邊司)의 직책까지 겸하였습니다.
임자년(壬子年, 1672년 현종 13년)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다가 곧 갈렸으며, 가을에 선영(先塋)에 귀성(歸省)을 청원하자 관직을 몸에 지닌 채로 가기를 허락하였습니다.
계축년(癸丑年, 1673년 현종 14년)에 모부인 상을 당하였습니다.
금상(今上, 숙종(肅宗)) 원년 을묘년(乙卯年, 1675년 숙종 원년)에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고, 겨울에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나갔다.
정사년(丁巳年, 1677년 숙종 3년) 봄에 다시 어영(御營)으로 들어가 주사(籌司, 비변사의 별칭)에 포도 대장을 겸하였는데, 귀먹었다고 하여 사직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경(卿)은 신망이 높은 장수이니 안심하라.
” 하였습니다.
여름에 재해(災害)로 인하여 널리 재앙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물었는데, 공이 군포(軍布)의 남징(濫徵)을 면제하기를 청하였습니다.
무오년(戊午年, 1678년 숙종 4년)에 병이 중하니 어의(御醫)가 약을 가지고 와서 병을 살펴보고 공의 말을 기록하여 아뢰었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경의 병을 매우 염려하였더니 증세가 점차로 경감되는 것을 대단히 기뻐합니다.
” 하였습니다.
또 모든 직무의 해면을 청원하여 윤허를 얻었다.
기미년(己未年, 1679년 숙종 5년)에 충훈부 유사당상(忠勳府有司堂上)이 되고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에 자헌 대부(資憲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임술년(壬戌年, 1682년 숙종 8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전후하여 여러 번 충훈부 유사를 사직했으나 소(疏)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다시 사직하여 비로소 해면을 얻은 것입니다.
계해년(癸亥年, 1683년 숙종 9년) 5월 16일에 졸(卒)하니 수(壽)가 63세입니다.
부음이 임금에게 알려지니 임금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치제(致祭)하였습니다.
공이 별세했는데도 집에는 죽을 쑬 양식도 없어서 장례를 치를 방법이 없었는데, 재상 중에 ‘공은 여러 번 장수가 되어 나라 일에 힘써서 업적이 많았습니다.
이제 들으매 몸이 죽었는데도 집이 가난하여 장사지낼 길이 없습니다고 하니 마땅히 휼전(恤典, 구휼하는 은전)이 있어야 합니다.
’라고 말한 이가 있자, 이에 임금이 유사(有司)에 전지(傳旨)를 내려 장례비용을 지급하였습니다.
이해 9월에 인천 신현(新峴)의 방곡(芳谷)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지난날 대오(隊伍)에 있던 자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상엿줄을 잡고서 곡하며 보냈습니다.
공은 상모(狀貌)가 웅위(雄偉)하고 침묵하여 말이 없었으며, 희(喜)ㆍ노(怒)의 감정을 성색(聲色)에 나타나지 않았고, 비록 창졸간이라 하더라도 일찍이 말을 급하게 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숭릉(崇陵, 현종(顯宗))의 지우를 받아 전후하여 장려하고 발탁하였으므로, 은혜에 감격하여 직무를 봉행(奉行)함에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병들자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 은혜를 받고도 보답하지 못했으니, 죽어도 여한(餘恨)이 있습니다.
” 하였습니다.
어버이 섬기기에 효성을 극진히 했고, 상사(喪事)에는 슬픔을 다하여서 한여름 무더위에도 상복을 벗지 않았습니다.
성품이 성실하고도 순박하여서 화미(華美)를 숭상하지 않았고, 빙상(氷霜) 같은 지조를 지켜서 진실로 의리에 어긋나는 것이면 한 가지 물건도 취하지 않고 외직(外職)에 있을 때는 뇌물을 주어서 사람을 사귀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선대의 유업(遺業) 외에는 전택(田宅)을 한 구역도 넓히지 않았고 하인 한 사람도 늘리지 않았습니다.
외가(外家)에서 재산을 나누어주었지만 돌려보내어 받지 않았고, 사람들과는 너그럽게 포용하여서 다투지 않았으며, 자제를 가르침에 엄격하고도 법도가 있었습니다.
장수가 되어서는 사졸(士卒)을 어루만져 사랑하고 장교(將校)들을 예(禮)로써 대했으므로 사람들이 그 덕을 사모하여 즐겨 쓰임이 되었다.
더욱 몸가짐을 삼가서 신칙하고 겸손하고 두려워하였으므로 제배(除拜)가 있을 때마다 번번이 조심하고 불안해하며 3, 4차에 걸쳐 해면(解免)을 빌고 자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입조(立朝)한 지 30여 년에 공사간 견책이 없었다.
일찍이 종실(宗室)의 신분 높은 사람이 공과 함께 총관부(摠管府)에서 숙직한 일이 있었는데, 뒤에 공을 찾아왔으므로 공이 사절하기를, “외정(外廷)의 신하와 종반(宗班)은 길이 다른데, 더구나 이 사람은 군무(軍務)를 담당하고 있는 몸인지라, 더욱 찾아오는 것은 불가합니다.
”고 하니, 그 사람이 부끄럽게 여겨서 가버렸다.
도적을 금하는 법사(法司)에서 형장(刑杖)을 남용하고 또 혹독하여서 신문(訊問)을 당하는 자가 거짓 승복하는 일이 많았는데, 공이 죄수들을 모두 딴 방에 가두어서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두루 찾아다니면서 힐문(詰問)하여 실정을 조사하여서 때로는 형벌을 더하지 않고도 실토(實吐)를 받았으며 그 억울한 것도 밝혀짐을 얻었다.
경조(京兆, 한성부)에 있을 때에 한 아전이 가짜 문권(文券)을 만들어서 여러 번 공을 시험했는데, 공이 처음에는 문권을 빼내어 아전을 향해 부채질하고 두 번째는 자리 밑에 넣어두고 세 번째에 이르러서는 중벌(重罰)로 다스렸으므로 부중(府中)에서 미담(美談)으로 전해 내려온다.
공은 평소에 술을 좋아했는데, 현종(顯宗)이 술 마시는 일을 경계한 뒤부터는 술잔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일은 가까운 시일 안에 효과가 나타남을 구하지 않고 반드시 먼 앞날을 생각했는데, 군인과 장교에 대한 상사(賞賜)를 결코 정도에 넘치지 않게 하여서 말하기를, “일 없을 때에 후하게 상 준다면 어려운 때에 당하여 무엇으로 권면하랴?” 하자, 사람들은 그 말이 옳지 않다고 했으나, 정태화공만은 옳게 여겼다.
상국(相國) 여성제(呂聖齊)가 일찍이 융막(戎幕, 군무(軍務)를 맡아보는 곳)에서 공을 보좌했는데, 공을 깊이 공경하여 삼사(三司)에 있을 때에 자주 공을 그 본댁으로 문후(問候)하였습니다.
공이 졸(卒)하자 이상진(李尙眞)공이 만사(挽詞)를 지어 이르기를, “삼가고 신칙함은 문사(文士)와 같으며 청렴하고 유능함은 곧 무장(武將)의 으뜸이네[謹飭如文士 廉能卽武宗]” 하였습니다.
전부인(前夫人)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대사간(大司諫) 이진(李)의 딸로서 인자하고 현숙하였는데, 신사년(辛巳年, 1641년 인조 19년)에 졸하여 덕산(德山)의 봉명동(鳳鳴洞)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지냈습니다.
후부인(後夫人)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이공량(李公亮)의 딸인데, 몸을 삼가함으로써 부도(婦道)를 지키고 성심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었으며, 비복(婢僕)을 부리되 그 환심을 얻고 귀신 섬기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집에 무당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정묘년(丁卯年, 1687년 숙종 13년)에 졸했으니, 수(壽)가 60세입니다.
공의 무덤 왼쪽에 부장(祔葬)하였습니다.
전부인이 딸 하나를 두었으니, 사위는 현감 정행만(鄭行萬)입니다.
후부인이 4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이기하(李基夏)는 병조 참판에다 훈련 대장을 겸하고 한성군(韓城君)에 습봉(襲封)되었다.
둘째 이기한(李基漢)은 봉사(奉事)입니다.
셋째는 이수천(李壽千), 넷째는 이기명(李基明)입니다.
사위는 봉사 서종진(徐宗震)과 장령 양성규(梁聖揆)입니다.
측실(側室)에서 4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 이기형(李基亨)은 절충 장군(折衝將軍)이고, 이기화(李基華)ㆍ이기방(李基邦)ㆍ이기만(李基萬)입니다.
사위는 찰방(察訪) 구태주(具泰柱), 정녕(鄭寧), 김희경(金熙敬), 현감 방만원(方萬元)입니다.
나 박세당(朴世堂)이 일찍이 병마 평사(兵馬評事)로서 공을 북막(北幕)에서 섬겼는데, 한성군(韓城君, 이기하)이 ‘아버님의 옛 동료로서 지금에 살아 남은 자가 오직 한 사람 뿐입니다.
’고 하면서 내게 비명(碑銘)을 부탁하였습니다.
내 늙고 병들어 정신이 흐려서 공의 아름답고도 성대한 공업(功業)을 발양하지 못할까 두렵지만 의리로 보아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행장(行狀)에 근거하여 사업과 덕행을 차례로 서술하고 (비명(碑銘)을) 시(詩)로써 다음과 같이 쓴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집안 대대로 사학(詞學, 시ㆍ문을 숭상하는 학문)을 전했는데, 연함(燕頷)이 봉후(封侯)된 것1)처럼 한천군(韓川君, 이의배(李義培))이 분발한 자취는 임금 곁에서 보좌한 충성심 대단했고, 임금 위해 몸 바친 의리 격렬하였도다.
위엄스러운 한원군(韓原君, 이목(李穆))은 가정 교훈을 욕되게 하지 않아, 백인(白刃)도 용감하게 밟았으니 옛날의 동기2)(童踦)도 이만 같지 못하네.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명성 청사(靑史)에 연이어 적혔는데, 공이 그 뒤를 이어서 뛰어나게 두각(頭角)을 나타내어, 훤칠한 그 모습과 침착하고도 웅대한 그 지략은 한(漢)나라 때 구순3)(寇恂)으로 일컬어지고 겸하여 백성을 잘 다스렸도다.
저 먼 회령(會寧) 땅은 동북 지방의 울타리였는데,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명성과 치적을 크게 드러냈네.
약속한 신의가 이미 분명하니 사나운 오랑캐들 굴복했도다.
변방의 백성이 안도(安堵)하고 이역(異域)의 풍속도 위압하였네.
네 곳 진영(鎭營)을 오가면서 요지(要地)와 요지 아닌 곳을 두루 거쳤는데, 북쪽 관문(關門)을 맡아 지킴은 인선(人選)에 신중을 기하는 가장 영광된 자리로다.
유임(留任)을 허락하는 은총 내려서 먼 변방의 안정을 생각하였도다.
성군(聖君)의 지우(智遇) 받아 2품 재상의 높은 지위 올라, 안에서 병권(兵權)을 맡아 문에 병장기 늘어 세우고, 위엄과 은혜가 병행하여 사졸(士卒)이 힘을 합치고 서로 화목하였네.
나라의 간성(干城)으로 믿어서 막중한 임무를 맡겼는데, 장수 별이 떨어져 재앙을 알리니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거리에서 곡하네.
지금 세상에 황문(黃門)이 없으니 조충국(趙充國)처럼 화상을 그려 찬양할까?4) 앞으로 어떤 사람이든지 내가 쓴 이 비명을 볼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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